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뎀 바흐-첼레프스키 (문단 편집) === [[전간기]]: [[나치당]] 입당 === 종전 후에는 [[자유군단]]에서 가입해 [[실레시아|슐레지엔]] 지방의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. [[바이마르 공화국]]이 수립된 후에도 군에 남아 복무하다가 [[1924년]]에 강제로 전역당했다.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에서 밝힌 이유는 여동생 2명이 [[유대인]]과 결혼한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그 당시부터 [[나치당]]을 홍보하고 유세하는 데 앞장섰던 것 때문에 쫓겨난 것이라고 한다. [[https://books.google.co.kr/books?id=jR49G7eyxBUC&pg=PA283&dq=erich+von+dem+bach+zelewski&hl=ko&sa=X&ved=0ahUKEwiJ94fDqY7OAhXMPY8KHUmTBiE4ChDoAQgZMAA#v=onepage&q=erich%20von%20dem%20bach%20zelewski&f=false|출처.]] 이후에는 [[국경수비대]](Grenzschutz)에서 [[1930년]]까지 복무했다. [[1925년]]부터 이름을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(von dem Bach-Zelewski)로 바꾸었다. 국경수비대에서 전역한 후에는 1930년에 [[나치당]]의 당원이 되었고(당원 번호 480101) 1년 뒤인 [[1931년]] [[슈츠슈타펠]]에 가입하였다(대원 번호 9831). 나치당 가입 후에는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, [[아돌프 아이히만]], [[쿠르트 달루게]] 등과 친분을 맺었다. [[1932년]]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여 나치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력도 있다. 슈츠슈타펠 가입 당시에는 훈련병에 불과했으나 초고속 승진 코스를 밟아 2년 만에 여단지도자(Brigadeführer)가 될 정도였다. [[1934년]]에는 [[장검의 밤]]에 가담해 [[에른스트 룀]]을 처단하고 개인적인 정적을 숙청하기도 했다. 3년 뒤인 [[1937년]]에는 [[동프로이센]], [[폼메른]] 지방의 [[무장친위대]] 부대, [[게슈타포]]를 통솔하는 권한이 쥐어졌고 [[1939년]]에는 [[중장|집단지도자]](Gruppenführer)로 진급하였고, 자신의 출신을 모르게 하기 위해 "첼레프스키"라는 이름을 없애 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